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문단 편집) === [[쇼군]] 재임기 === 요리토모는 [[쇼군]]이 된 이후 측근에 대해 자비없는 [[숙청]]을 시작했다. 첫 번째 대상이 된 것은 요리토모가 금한 바 있는 조정 관직에 취임한 동생 요시츠네였다. 요시츠네는 억울함을 호소하러 가마쿠라에 찾아왔지만 요리토모는 그를 내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자객까지 보냈다. 암살 시도는 미수로 끝이 났고, 격노한 요시츠네는 자객을 손수 참수한 후 이에 맞서 고시라카와 법황에게 요리토모 토벌 허가를 받아 미나모토노 유키이에와 협력하여 병사를 일으키려고 했다. 그러나 요리토모는 무사들로부터 확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면, 요시츠네는 무사들에게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병사가 모이지 않아서''' 도주하는 꼴이 됐으니 인망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훗날 미화된 것처럼 점잖은 비련의 [[영웅]]이 아니라 저돌적이고 상당히 야만적인 무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응하는 병력이 너무나 적어 실패하고 결국 오슈[* 오슈(奧州) [[무츠|무츠국]](陸奧國). 현재의 [[이와테현]].] 지방으로 도망쳐 [[히라이즈미초|히라이즈미]]의 [[오슈 후지와라|오슈 후지와라씨]]에게 의지했다. 요리토모는 [[1184년]]에 '''쿠몬죠'''(公文所, 공문소)[* 행정기관으로, 후일 만도코로(政所, 정소)로 개칭되었다.]와 '''몬츄죠'''(問注所, 문주소)[* 토지 관련 재판 및 사법기구]를 두었으며, 이듬해인 [[1185년]] 헤이케가 멸망하자 교토 [[조정]]으로부터 각지의 행정관을 임명할 [[권리]]를 받게 되어 사실상 일본의 지배자 지위를 인정받게 되었다. [[1189년]]에는 오슈 후지와라씨의 제4대 당주인 [[후지와라노 야스히라]]를 협박해 요시츠네를 죽게 하고, 그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오슈까지 침공해 오슈 후지와라씨를 멸망시켜 버리고 히라이즈미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로써 간토 등의 도고쿠(동국) 지방을 근거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는 기반을 확고히 다지고 일본 전체를 장악했다. 그리고 [[1193년]]에는 어이없는 트집을 잡아 요시츠네와 함께 종군하며 공이 컸던 이복동생 노리요리마저 처형했다.[* 1193년 요리토모의 가신인 쿠도 스케츠네에게 부모를 잃은 소가 형제가 자신들도 요리토모 휘하의 무사로 임관해서 주군의 사냥길에 합류해 원수인 쿠도를 참살하는 유명한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의 대혼란으로 요리토모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퍼졌는데, 노리요리가 이 소문을 듣고 걱정하는 요리토모의 부인 [[호조 마사코]]를 안심시키기 위해 '''"형수님,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있습니다."'''라는 한 마디를 했다고 형 요리토모의 자리를 노린다는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은 것이었다. 당혹해 제대로 된 변명을 하지 못한 노리요리는 유배되었다가 처형당했다. 여담으로, 이 소가 형제의 복수 사건은 무사도의 표본이 된 복수극으로 널리 알려져 각종 [[가부키]] 등 대중매체의 인기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막부 수립 과정에서 막대한 공훈을 세운 형제들을 주살한 것은 그렇잖아도 잦은 친족 간 유혈사태로 인해 헤이케에 비해 믿을 만한 씨족 세력이 적었던 카와치 겐지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후계자가 죽자 순식간에 대가 끊기는 결과를 낳았다. [[1195년]]에는 [[딸]]인 오오히메를 [[황후]]로 만들려 획책하는 과정에서 [[고시라카와 덴노|고시라카와 법황]]의 애첩이었던 정계의 거물 탄고노츠보네를 비롯한 여러 [[공가|쿠게]][* 公家. 무사와 대척점에 서있는 [[교토]]의 귀족들을 말하며, 무사를 이르는 다른 말인 부케(武家)와 대비되는 단어이다. 공가 또는 공경이라고도 칭한다. 조정의 관위는 높았지만 이후 무사 중심의 [[사회]]로 변하면서 점차적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는 한계가 생겼으나 대신 문화적,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조정과 쿠게 층에 영향력을 가진 무사와 그렇지 않은 무사의 차이는 조정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센고쿠 시대]]에도 매우 컸다. 이때 천황이나 쿠게들이 있는 교토에 가서 이들은 만나 영향력을 늘리는 것을 '''[[상경]]'''이라고 했으며, [[천하인]]의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이마가와 요시모토]]나 [[다케다 신겐]] 같은 효웅들이 오다 가문을 눈엣가시로 여겼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상경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세력이 오다 가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는 이들을 막고 상경에 성공했다.]들을 [[숙청]]하는 '''겐큐 7년의 정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래 놓고 오오히메가 [[요절]]해 황후 책립 계획은 실패했고, 도리어 조정내에서 반 막부파가 대두해 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